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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30 남성이라는 난감한 생물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1. 9. 2. 07:10
학생들을 태우고 세미나 합숙(원문은 ‘제미 합숙ゼミ合宿’. 제미란, 일본 학부에 흔히 있는 프로그램으로서, 보통 한 교수 아래서 학생 여럿이 1년 이상 연구 활동을 하는 모양을 띠고 있음 - 옮긴이) 을 가는 도중에 카 스테레오에서 모리 신이치의 곡 ‘겨울 리비에라’(마쓰모토 다카시 작사, 오타키 에이이치 작곡)가 나왔다. 가사에 ‘겨울의 리비에라, 남자란 녀석은 항구를 떠나는 배와 같도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 대목에서 동승한 여학생 4명이 입을 크게 벌리고 웃어재꼈다.
‘남자란 녀석은’ 이라든가 ‘인생이란 놈은’ 같이 사설을 늘어놓는 말을 그녀들은 농담으로밖에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는 건전한 반응이다.
하지만 아가씨들, 잠깐 기다려주게나.
많은 남자들에게 있어서 ‘남자’가 문화적인 허구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문제는, 남자들이 이 허구를 농담이 아니라, 일종의 전통으로써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는 ‘사실’이다.
오다지마 다카시에 의하면, 돈을 빌릴 때 ‘사내 주제에, 잔말 말고 돈이나 내 주게’라며 뻗대고, 갚아야 할 날이 닥치면 ‘사내 주제에, 그깟 돈 가지고 조잔하게 구는 거 아니야’하고 뻗대는 게 돈 빌리기의 정석이라는 모양이다. 남자들은 ‘사내 주제에’라는 일갈에 약하다. ‘사내 주제에’라는 한 마디로 협상의 과반수를 제압할 수 있다.
아가씨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러니까 ‘남자’라는 말이 갖고 있는 주술적 효과의 ‘현실성’이다.
레비스트로스에 의하면, 야쿠트 족 사람들은 치통을 겪을 때 딱따구리의 부리를 만지면 통증이 낫는다고 믿는다. 약리학적 근거가 없는 치료법도, 그 치료법에 대한 집합적인 동의가 존재하면 효과적인 차도를 불러일으킨다.
‘사내 주제에’라는 한마디로 자기 지갑의 내용물이나 상대편 주장의 불합리성에 대한 판단이 정지되어버리는 것은, ‘남자들’의 사고가 본질적으로 레비스트로스가 말하는 ‘야생의 사고’에 속해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야생의 사고’가 각자 ‘성스러운 것’을 갖고 있는 것처럼 ‘남자의 사고’도 고유의 ‘성스러운 것’을 갖고 있다. 야생의 사고가 외면적으로는 쓸모 없이 보이는 번잡한 의례를 반드시 수반하는 것과 같이, ‘남자들’도 의미 불명의 여러가지 의례로 나날의 생활을 정돈한다. ‘남자들’에게 있어서 ‘남자로서의 존재’는 일종의 성무일과인 것이다.
법률, 화폐, 언어와 같은 공동 환상에 현실감을 느끼고 마는 것, 메커니즘에 정서적으로 관여하게 되는 것, 하드하면서도 젠틀해지는 것, 오후 다섯 시에 리츠의 바에서 기믈렛을 마시는 것, 문득 저 바다 너머 머나먼 수평선에 지는 석양을 바라보는 것... 이러한 짓거리의 집적이 ‘남자들’의 의례를 이루고 있다.
금방 이해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이 흥미 깊은 생물은 명백히 일종의 주술적 사고에 기반해 살고 있다. 다시금 레비스트로스에 의하면, 과학적 사고란 ‘우선 여러가지 층위를 구별하고 나서, 그 가운데 일부에만 존재하는 일종의 인과성이라는 형식이 성립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에 반해, 주술적 사고는 ‘포괄적 혹은 전면적인 인과성을 공준으로 두는’ 사고이다.
이해하기 쉽게 바꿔 말해보자. ‘사내 주제에’라고 말하는 친구에게 얼마 남지도 않은 돈을 빌려주고 마는 남자는, 그의 아내가 볼 때 그저 바보다. 하지만 단기적인 경제적 불이익의 보상으로서 그가 ‘남자들’ 사이에서 높은 평가를 획득하고, 결과적으로는 짭짤한 정치적, 사회적인 지위를 얻는다면, 그는 단기적 불이익이 장기적인 이익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감지하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얼핏 보면 심미적 기준만을 기준으로 한 비합리적인 행위가, 실은 포괄적 혹은 정밀한 분류적 사고의 소산이라는 점이 사후적으로 판명된다는 것을, 레비스트로스는 ‘야생적 사고의 선구적 과학성’으로 내걸었다.
같은 내용이 ‘남자들’의 사고에 대해서도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나는 종종 생각한다. 그런고로 ‘남자들’의 사고를 ‘야생의 사고’로 인정하는 일을 나는 요구하고자 한다. 주술적 사고를 비과학적, 비합리적이라고 일소에 부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세계 인식에 대한 하나의 형식으로써, 일종의 ‘지적 운용’으로 받아들여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남자들’을 미개한 것으로 배제한다든가 교화의 대상으로 다루지 않고, 국소적인, 그러나 명예로운 인간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인지해주었으면 한다. 이것이 내가 진심으로 호소하는 바이다.
만약 ‘남자들’의 고유한 사고나 행동 양식을 학술적으로 기술 분석하는 것을 ‘남성학’이라고 호칭할 수 있다면 ‘남성학’자는, 문화인류학자가 원시 사회의 정보 제공원과 조우했을 때처럼, ‘남자들’을 선입견 없이 약간의 경의와 넘쳐나는 호기심으로써 관찰하게 되리라.
나는 ‘남성학’이란 그러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나도 미력한 정보 제공원으로서 보탬이 되고자 한다. 하지만 우에노 치즈코가 구상하고 있는 ‘남성학’은 그러한 것과는 다르다. 그녀의 ‘남성학’은 관찰이나 기술이 아니라, 교화와 훈시를 위한 언설이다. 나는 약간의 실망을 품고서 이 서적을 소개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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