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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30 역사수정주의에 관해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1. 8. 30. 07:00

    일본사 교과서의 ‘종군위안부’ 문제 기술을 둘러싼 ‘자학적인 사관’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오늘은 이 문제를 조금 진지하게 고찰해보고자 한다.

     

    97년도에 채용된 중학교 사회과 교과서에는 역사분야의 교과서 전 7종 전부 ‘종군위안부’에 대해 기술이 실려 있다. 이를 ‘자학 사관’ ‘암흑 사관’ ‘반일 사관’의 표출이라고 엄히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선봉장을 맡고 있는 이가 도쿄대 교육학부 교수 후지오카 노부가쓰이다. 흥미가 생겨 그의 저서 <오욕의 근현대사>를 읽어보았다. 그리고 조금은 암담한 기분으로 책을 덮었다. 그것은 그가 고발하는 사회과 교육의 현상에 대해서가 아닌, 그러한 비판이 ‘비판’으로서 성립해버리는 현대의 지적 퇴폐에 대한 슬픔이다.

     

    이 문제에 대한 후지오카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2차 대전 이전의 일본에서는 매춘이 합법적인 장사였다. 그러므로 전투 현장에서 군의 승인과 보호 아래 매춘 시설이 있었다는 것은 나무랄 것이 못된다. 우선, 어느 나라의 군대라고 할지라도 비슷한 시설을 갖추고 있다. 일본인만이 호색 음란한 인종이라는 식의 기술은 객관성을 결여하고 있다.

     

    2. ‘위안부’의 강제연행이 이루어졌다는 확정적인 증거는 없다.

     

    3. 중학생에게 전투 현장에서의 매춘행위같은 ‘인간의 어두운 면’을 구태여 가르쳐도 의미가 없다.

     

    4. 모든 교과서가 이 기술을 채용하고자 손발을 맞추고 있는 것은 ‘담합’ 비슷한 것으로, 교육 현장이 ‘목소리 큰 언론이 만들어내는 <분위기>에 지배당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일본사 교과서가 자국의 근대사에 대해 그 추악한 측면만을 강조한다면 그 결과로 일본의 아이들은 모두 일본인이라는 사실을 부끄러이 여기게 될 것이라고 후지오카는 주장한다. ‘이러한 교과서를 아이들에게 쥐여주면 결국 일본은 부식되고, 으깨지며, 용해되고, 해체될 것이다. 근대사 교육의 방향이야말로 국민을 국민으로서 형성케 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자랑할만한 역사를 공유하지 않는 한, 국민의 자기형성은 불가능하다.’

     

    이상이 후지오카가 주장하는 바의 개요다.

     

    일견해 보면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강제연행의 사실이 있었는가 없었는가 하는 역사적 확실성이 의논의 초점으로 보이는데, 후지오카 담론의 이데올로기적인 수준은 그러한 사실문제에 있지 않다. 후지오카의 의논 가운데 주목해야 할 점은, 가령 강제연행의 사실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가령 군에 의한 위안시설의 직접 관리 사실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지식을 가르쳐 보았자 헛되이 아이들에게 피해를 입히게 되니 교과서에 쓰여져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데에 있다.

     

    나는 이 사고방식에 동의할 수 없다.

     

    후지오카의 판단에는 몇 가지 예단이 포함되어 있다. 그것을 차례대로 따라 논해보겠다.

     

     

    우선, 후지오카는 국민이 자국의 역사에 대해 ‘자랑스러움’을 느껴야 한다는 것을 ‘자명한 진리’라고 말하고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후지오카 자신이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근대 국가는 어디를 둘러봐도 상당한 치부나 어두운 면을 떠안고 있다. ‘손이 깨끗한’ 나라는 아무도 없다. 미국은 매카시즘이나 베트남 전쟁이나 케네디 암살 등등 기가 꺾일 만한 역사적 과거를 떠안고 있다. 원주민 학살과 토지의 찬탈로 시작한 미국 건국의 역사 그 자체가 억압된 기억으로 터부시된다.

     

    러시아는 스탈린주의의 트라우마로부터 결코 헤어나오지 못하리라. 독일은 나치즘, 중국은 문화대혁명, 프랑스는 비시 정권에 대해서 등, 모든 대국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를 갖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나라들이 중학교 교과서가 ‘자국의 역사에 긍지를 갖게’ 하기 위해 부끄러운 역사적 사실을 가르치지 않은 채로 놔둔다면 우리들은 납득을 할 수 없다.

     

    ‘가령 강제수용소에서 대량 학살이라는 사실이 있었다고 쳐도, 그러한 지식은 헛되이 아이들에게 피해를 입히게 되므로 교과서에 쓰여져서는 안 된다’고 독일의 교육학자가 주장한다면 (실제로 그런 주장을 하는 자가 존재한다) 후지오카도 여기에 찬성하지는 못할 것이다.

     

    자국 역사의 어두운 면에 대해 ‘치욕’의 기분을 느끼는 것은, 그 영광에 대해 ‘자부심’을 갖는 것과 똑같이 중요한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무지에 기반한 ‘자부심’은 그저 우쭐함에 지나지 않으며, 그러한 ‘자부심’에 의기양양히 고무되는 자는 결코 후지오카가 꿈꾸는 ‘국가적 위신’을 얻을 수 없다.

     

     

    두 번째. 후지오카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인간의 어두운 면을 조숙하게 폭로한다고 할지라도 딱히 득이 되는 것이 없다. 어두운 면에 눈을 돌릴 필요는 없다는 의견이 있는데, 그러한 지식은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아이들이 자연스레 익히게 되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일종의 ‘타불라 라사(무구 상태)’이며, ‘교과서’를 통해 아이들은 그러한 ‘빈 서판’에 지식을 써넣어간다, 는 게 후지오카가 품고 있는 ‘교육’의 이미지이다. 교육자에게 있어서 아마도 이상적일 이런 이미지는 그러나 현실과는 거리가 있는 머나먼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현대의 중학생은 무균실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의 세계에는 치열한 경쟁이 있고, 이지메가 있고, 폭행이 있고, 학대가 있고, 고립이 있고, 권력 투쟁이 있다. 이렇게 빡빡하고 스트레스 넘치는 인간관계 가운데 아이들은 필사적으로 자신을 보호해가며 살아가고 있다. ‘인간의 어두운 면’을 ‘폭로’하는 구석이 있는 게 그들의 ‘일상’이다. 그들이 이 시대를 아무 흠결 없이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후지오카의 생각과는 반대로 ‘인간의 어두운 면’에 대한 통찰과 함께, 인간의 비열함과 공격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상상력이 불가결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를테면 ‘매춘’은 현대 여중고교생에게 있어서 그것을 용인할 것인가 말 것인가,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즉각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것이 요구되고 있는 긴급하고도 절실한 논건이다.

     

    후지오카가 말하는 바와 같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장사’이고 어느 나라에나 있는 것이니만큼, 중학생이 이 사안을 두고 의논하고자 하는 바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이제까지의 학교 교육을 지배해온 (그들 자신의 상당수가 매춘 경험을 가진 교사들에 의해 지지되고 있는) 미온적 견해와 같은 것이다.

     

    그러한 ‘미봉책’적 대응의 헛됨이야말로 그것을 오늘날 ‘원조교제’를 하는 소녀들이 ‘폭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만약 중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할 ‘이 곤란한 시대를 살아남기 위한 지식’이 있다면, 그것은 (후지오카의 말을 빌리면) ‘목소리 큰’ 녀석의 말을 믿지 말라는 결론에 이를 것이다. 속설을 믿지 말라, 언론을 믿지 말라, 교과서를 믿지 말라, 교사를 믿지 말라, 부모를 믿지 말라,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는 필자의 말을 믿지 말라.

     

    이러한 이중 구속 상황을 견뎌낼 지성을 자력으로 갈고 닦는 것 말고는, 아이들의 성숙과 자립을 이루기 위한 도리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교육학자인 후지오카의 교육관에 있어서 내가 동의할 수 없는 다른 한 가지 점은, 교과서가 제공하는 정보의 영향력을 과대 평가하는 후지오카의 태도다.

     

    이는 후지오카 자신의 자기형성사와도 관련되어 있다는 느낌이 든다.

     

    본인이 쓴 글을 믿는 한, 후지오카는 소년 시절에 맹렬한 지식욕에 휩싸여 ‘학교에 구비되어 있는 여러 도서를 다 읽어버린 뒤, 백과사전의 ‘가’ 항목부터 써내려가는 어리석은 일을 했었다’는 모양이다. <007 닥터 노>에 나오는 독학자 우술라 안드레스를 제외하고는, 백과사전을 순차적으로 읽으며 지식을 몸에 익혔다는 인간을 접하게 된 사례는 내가 아는 한 후지오카가 처음이다. 이것은 후지오카가 갖고 있는 사고의 ‘징후’를 보여주는 중요한 에피소드라고 보여진다.

     

    홋카이도대 입학 후, 후지오카는 민청계 활동가가 되었지만 그가 이 ‘혁명당파’에서의 경험을 보고하고 있는 것은 ‘소련 공산당사’의 독서회 뿐이다. 독서회에서 좌익 공부를 한 후지오카는 그 가운데 흐루쇼프의 ‘텍스트’나 솔제니친, 메드베데프의 ‘문헌’을 통해 ‘스탈린주의를 극복’한다. 더욱이 그 후, 후지오카는 ‘내 인식의 틀을 바꾸는 최초의, 더욱이 아마 최대의 요인’이 되는 ‘시바 료타로 작품과의 만남’을 계기로 ‘역사 수정주의 사관(원문은 자유주의 사관自由主義史観 - 옮긴이)’을 확립한다.

     

    만약 쓰여진 게 맞다면, 후지오카에게 있어서 결정적인 경험은 항상 서적으로부터 유래하였다. 서적을 축으로 자기형성을 닦아나간 인간이, 교과서가 아이들의 정신형성에 강한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다. 하지만, 그 판단에는 후지오카 자신의 상당히 특수적인 개인사의 편향이 관련되어 있지는 않을까.

     

    내가 아는 한, 후지오카같이 열의를 갖고 교과서를 읽으며 그로부터 지적 자양분을 흡수하는 중학생은 유감스럽게도 극히 소수이다. 그들의 많은 수는 교사나 부모의 지견이 아닌, 그들 고유의 협소한 인간관계와 그 닫힌 공간을 지배하는 (만화나 TV, 속설에 의해 길러진) 치졸한 이데올로기의 압도적인 대기압 아래에 세계관이나 인간관을 형성하고 있다. 시험을 치는 데 필요한 연도나 고유명사를 기억하기 위한 목적과는 별도로 절실한 지적 동기에 몰려-세상의 구성요소를 알기 위해- 역사 교과서를 펴는 중학생이 전국에 몇 명이나 있을까.

     

    딱 그만큼의 지적 갈망이 있다면, 그들은 반드시 자신의 서적을 고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부친들은 아이들이 도서관이나 집안의 책꽂이에 꽂혀 있는 시바 료타로를 읽는 일을 결코 금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역사교과서를 바꾸지 않는 한, 일본이라는 국가의 정신적 해체의 위기가 목전에 있다’는 후지오카의 현상 인식을 내가 공유할 수 없는 것은, 역사 교과서를 개정하면 ‘일본 국가의 정신적 해체 위기’를 회피할 수 있다는 후지오카의 전망이 현실 중학생의 지적 형성 프로세스에 대한 무지에 기반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후지오카의 의논 가운데, 내가 납득할 수 없는 것이 한가지 더 있다. 그것은 ‘자학사관’을 소리 높여 비판하는 후지오카의 로직이 ‘자학성’을 띠고 있음에 대한 후지오카 자신의 무자각함이다.

     

    후지오카에 의하면 ‘자학사관’에 기반한 역사를 배운 중학생들은 “일본이 <불결한> <약아빠진> <소견이 좁은> <비겁한> <고약한> <너무나 나쁜> 나라, 세계에서 <가장 나쁜> 나라라는 감상을 적었다”는 모양이다.

     

    이렇게 자국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의 만연을 염려하는 후지오카 자신은, 이를테면 미국의 정치 프로세스와 일본의 그것을 비교하며 이렇게 쓰고 있다.

     

    “그것을 바꿔 말하면, 일본의 정치는 대단히 폐쇄적이고 어두우며 조잔한 성질의 것이라는 말일 테다. 일본의 정치에는 제대로 된 논쟁이 결여되어 있고, 애써 의논을 피하고자 합의해서 일을 끝내려는 체질이 몸에 베어 있다. 그 결과, 국민은 어떠한 정책이 국민의 행복에 결부되는가를 판단할 재료를 제공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일본 국민은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이미 무관심해서, 일본이라는 국가로서 대응이 필요한 위기가 닥쳐오면, 어떠한 원리를 세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그 근거가 되는 지식이나 지력을 결여하고 있다.”

     

    통렬한 비판이다. 여기에 힘입어 후지오카는 “경제지상주의와 <평화 바보(2차 대전 이후 미국의 군사적 보호를 받으며 자위대가 교전에 한 번도 참여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일본인의 정신상태에 일종의 해이함을 불러왔다는 담론 - 옮긴이)>에 의해, 이념을 상실한 자민당 일당 지배” 아래서 걸프전에 파병을 망설인 가이후 정권, 또한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군의 관여를 인정한 미야자와 정권이 “일본의 국제적 위신을 결정적으로 끌어내렸다”고 딱 잘라 단언한다.

     

    그렇게, 이 저서 전체를 통해 일관되게 ‘일본은 <불결하고> <약아빠졌다는> (이하 생략)’ “감상을 적고 있는” 후지오카 본인은 어째서 자신의 전후사관이 ‘자학적’이라는 생각을 못하는 것일까?

     

    나로서는 이해가 안 된다.

     

    나는 후지오카의 저서를 읽으며 기가 죽었다. 정말로 한심한 나라에 태어났다는 게 (후지오카와는 조금 다른 의미지만) 절절하게 몸 속에 스며들어 낙담했다. 나같은 독자가 늘어나면 ‘결국 일본은 부식되고, 으깨지며, 용해되고, 해체되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

     

    우리들은 지성을 검증하는 경우에 보통 ‘자기비판능력’을 기준으로 삼는다. 자신의 무지, 편견, 이데올로기성, 사악함, 그러한 것을 기정 사실로 해 두고 생각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잣대로 우리들은 다른 사람의 지성을 계량한다. 자신의 박식, 공정무사, 정의를 틀림 없는 전제로 두고 생각하는 녀석을 우리들은 ‘바보’라고 불러도 좋은 것이다.

     

    후지오카가 그 자신의 지적 형성의 장소에 처해 있는, 그에게 도쿄대 교수라는 이름 높은 지위를 부여한 일본의 전후 체제 전체를 험담하듯 매도하는 것은 ‘자기 비판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며, 이치에 맞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후지오카에게는 자학적으로 행세할 권리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동시에, 타인이 같은 이유로 자학적 자세를 취하는 것에 대해 후지오카에게는 불평할 권리가 없다고도 생각한다.

     

    후지오카의 행위와, 후지오카로부터 ‘자학 사관’이라고 비판받는 역사가가 하고 있는 그것은 ‘<어쩔 도리가 없는 일본>이란 언제부터 언제까지의 일본을 말하는 것인가’ 라는 물음에 대한 시간적인 범위의 취급 방식 차이 뿐이라고밖에는 내게 보이지 않는다.

     

     

    나 자신은 후지오카나 ‘마르크스주의자’가 공유하고 있는 이 생각考想을 ‘위기사관’, ‘음모사관’으로 부른다.

     

    ‘지금은 망국의 위기다’라고 경종을 난타하고, 이어서 ‘위기의 원흉은 누구인가?’ 라는 ‘범인 찾기’로 사회적인 ‘악’을 국소화하고, 그 숙청을 해결책으로서 처방하는 절차를 ‘과학’이라고 믿는 점에서 후지오카는 ‘헤겔 법철학 비판’에 나오는 마르크스와 썩 닮아 있다.

     

    후지오카는 ‘범인’ 상을 이런 식으로 그리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괴물이 소련 같은 형식으로 나타나는 경우에는 사람들에게 그것이 대적할 대상으로 가시화됩니다만, 그것이 타도되면 목표가 사라지게 되는 한편, 그 체액이 마치 세상 전체에 흩뿌려지는 모양새로 확산되며 준동을 계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국민의 방심>)

     

    ‘전염 병균’이나 ‘기생충’ 메타포로 ‘사회의 적’을 기술하는 방식을 편애하는 역사상의 인물들을 우리는 곧장 떠올릴 수 있는데 여기에는 이오시프 스탈린과 아돌프 히틀러, 마오쩌둥 등이 있다.

     

    후지오카는 이데올로기성이란 ‘메타포’의 형식을 취해 출현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백과사전’에 쓰여져 있지 않으니, 아마 알지 못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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