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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품 이전의 작가는 아무것도 아니다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La miseria y el esplendor 2026. 9. 30. 11:11

    오길비: 여기가 명색이 우치다 타츠루 교수 글 보러 오는 곳인데, 약 두달 간 함흥차사였지요? 교수님의 초기 논문 약 6만 자를 매일 번역하고 있고, 이제 절반 왔습니다. 여러분도 우치다 선생님 글을 읽으셔야 함이 마땅한 도리인데도 미처 생각이 미치지 못했습니다. 작가로 본격 데뷔하시기 전, 그러니까 마치 나무("타츠루"는 나무라는 뜻입니다)에 마디가 생길 때처럼, 마치 지금의 저처럼, 사회에 나가 새로이 '무언가(something)'로 출발하시는 시점시점마다 발표하셨던 귀중한 글입니다. 이에 일부를 소개드립니다.

    (뱀발. 선생님이 어느 책에서 ''노동을 왜 해야 하는지는 노동을 직접 해봐야만 알 수 있어, 짜샤"라고 하셨는데,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노동의 산물에 의해 비로소 그가 누구인지 안다"고 선생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뱀발 2. 오늘이 우치다 선생님의 만 76세 생신입니다. 만수무강하시기를 바라 마지아니합니다.)


    5 중간적인 것

    "작가는 그의 작품에 의해서만 스스로 드러나고, 자신을 실현한다. 작품 이전의 차원에서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고, 또한 그 누구도 아닌 것이다”.

     

     

    『문학은 어떻게 가능한가?』이래로 블랑쇼의 주제는, ‘전(前)-언어적 관념의 대리표상 체계로서의 에크리튀르’라는 전통적 언어관을 부정하고, 에크리튀르가 가진 고유한 역학을 정립해 보인 데 있었다. 즉 에크리튀르가 사유에 일으키는 ‘오염’과 ‘차이’를 적극적으로 평가함으로써 저자와 작품의 관계를 뒤집고자 했던 것이다.

     

    “작가는 그의 작품에 의해서만 스스로 드러나고, 자신을 실현한다. 작품 이전의 차원에서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고, 또한 그 누구도 아닌 것이다(52)”.

     

    에크리튀르에는 본래 저자에 속하지 않은 외부의 힘이 작용한다.

     

    “쓴다는 행위의 신비적이고 위험한 운동에 따라 저자는 자신의 문장이 자신을 어디에 이끄는지를 모르고서 시작하고, 그 결말을 무시하고서 작품을 쓰고자 하며, 그리하여 알 수 없는 것과 엮여서, 그를 뛰어넘는, 또한 그가 자신을 뛰어넘는 어떤 전개의 신비 속에 발을 들였다는 것을 느낀다(53)”.

     

    에크리튀르는 자기동일적 폐역에서 걸어나오는 것이며, ‘자신을 파괴하는 것과 엮이는 것’이다. ‘나는’이라고 비로소 씀과 동시에, 저자는 그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쓰며, 그가 생각했던 것은 쓸 수 없게 된다. 에크리튀르는 노동이 아니라 도박이며, 표현이 아니라 만남이고, 정주지에서 밭을 가는 게 아니라, 사막을 떠도는 것이다.

     

    블랑쇼는 에크리튀르의 산개적인 양식을 즐겨 유대적인 ‘추방의 진리’로 빗대 말한다.

     

    “이탈과 추방은 외부에 있는 것과의 적극적인 관계를 의미하고 있다. 그 요청에는 우리에게 우리가 가진 고유한 속성, 즉 일체를 같게 만들고, 일체를 재보고, 일체를 우리의 자아와 관계지으려는 우리의 권력에 스스로 빠지면 안되니 경계하라는 구석이 있다(54)”.

     

    “추방의 진리가 있다. 추방의 소명이 있다. 만약, 유대인이라는 처지로 말미암아 저 멀리 떠나가야 한다면, 그 떠남은, 머무를 장소 없는 정착을 강요하는 것이자, 한 개인, 한 집단 혹은 한 국가와의 고정된 권력 관계를 전부 파기하는 것이며 (......) 최종적으로는, 통일성과 자기동일성의 유혹을 뿌리치는 것이기 때문이다(55)”.

     

    ‘유대인의 처지’를 ‘쓰는 행위’로 바꿔쓴다 하더라도, 블랑쇼의 맥락은 털끝만끔도 흔들리지 않는다. 그것이 헤어짐의 두 가지 양식, 동일한 운동의 두 가지 형식이라면, ‘유대인이자 저술가’야말로, 이중의 헤어짐이 각인된 이상적인 작가가 될 자격이 있다. 블랑쇼가 프란츠 카프카를 질릴 새 없이 언급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이다.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는 유대인이다. - 옮긴이)

     

    “카프카가 세상으로부터 추방되었다 함은 곧, 가나안 땅에서 추방당하여, 사막을 떠도는 것을 의미한다. (......) 그는 이러한 외부를, 또 하나의 다른 세계로 확립함으로써, 이 방황을 새로운 자유의 원리, 기원으로 하기 위해 분투해야만 했다. 출구 없고, 확신 없는 싸움이다. 거기서 그가 쟁취했음직한 것은, 그 자신을 없앰, 망명의 진리, 한창 떠나는 자세로의 복귀이다. 스페인 측으로부터 추방당한 가운데, 종교적인 사람들이 망명의 극한까지 자신을 내몲으로써 도리어 망명의 극복을 꾀했던, 바로 그 유태의 심원한 사변에도 빗댈 만한 투쟁이었을 것이다(56)”.

     

    ‘심원한 사변’이란 카발라를 이르는 것이다, 라고 블랑쇼는 손수 주석을 달았다. 정확히는 카발라에서 파생된 17, 8세기의 종말론적 가짜 메시아주의 (사바타이-프랑크주의) 운동을 염두에 두고 있다. 이것의 가장 특이한 교설은 죄에 의한 구제라는 것인데, ‘율법을 어김으로써 신의 뜻을 이룬다’는 역설을 띤다.

     

    카프카의 작품을 ‘새로운 카발라’로 이르는 것은, 헤어져 있는 처지가 항상 이어지고, 고난받음으로써 메시아가 도래할 날이 다가오니, 종교를 버리면 은총을 얻는다고 믿었던 사바타이적 사고와의 유사성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종교운동을 문학 작품에 직접적으로 빗대는 것은 ‘과학적’이지 않다. 서로 다른 위상을 고려하지 않은 채 모델을 남용하는 것은 실증적 검증이라 할 수 없다. 허나, 블랑쇼가 위상을 비약함으로써, 어떤 모델이 갖고 있는 위상의 몇 층위를 관통하는 동일성을 보이려고 노력하는 점은 명백하다. 신적 원천에서 종말 시점에 이르기까지, 존재함은 은총의 감소를 수반하며 무한히 연환하고 있다, 고 생각한 게 카발라의 특징 중 하나다. 여기서는 위상이 서로 다름에도 같은 모델을 적용 가능하다는 사실 자체가, 모델의 진리성을 증명하는 셈이다.



    문학은 ‘권력을 자임하는 자기 자신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힘’이자, 흩어짐과 추방의 힘이다, 라고 블랑쇼는 말한다. 그러한 한편으로는, 질서, 체계, 전체성이라는 권력을 상징하는 통일, 구심의 힘이 역학적으로는 이미 전제되어 있다. 블랑쇼는 이러한 힘을 ‘문화’라고 못박는다.

     

    문화는 백과사전식으로 거대하게 집어삼키는 것이며, 그 지상 목표는 모든 사상을 파노라마와 같이 ‘전망’하는 최고 관조점의 정립이다. 문화는 질서를 흩뜨리거나 체계를 위협하는 모든 힘을 탄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반질서, 반체계, 반권력의 성질을 띠는 운동이야말로 문화를 살찌운다. 어떠한 문예상의 모험도 문화재로서 후세에 소유될 운명을 면할 수는 없다.

     

    “문학작품의 특성이란 창조적이라는 데 있으며, 한편, 문화의 특성은 창조된 것을 수확하는 데 있다(57)”.

     

    대항해시대의 모험이 식민지 지배에 봉사한 것과 같이, 문학의 ‘이의를 제기하는’ 힘은, 문화의 영역을 넓히고, 활성화하는 데 본의 아니게 이바지한다.

     

    문화와 문학, 통일과 산개, 이런 두 가지 힘이 다투는 장을, 블랑쇼는 ‘도서’라는 교묘한 비유로 나타낸다.

     

    블랑쇼의 말재주가 항상 그런 것처럼, 이 이야기도 또한 높은 추상성과 현물의 구체성을 동시에 함의하고 있다. 그 의미하는 바를 보면, 도서는 우선 문화의 진영에 줄세워진다.

     

    “앎의 저장고, 집적소로서의 도서는 앎과 동일화한다(58)”.

     

    “앎은 항상 ‘통일성’에 따르는 질서, 개념의 체계를 가리킨다(59)”.

     

    하지만, 그 역할은 단순하지 않다.

     

    “도서는 독해(렉튀르)와 에크리튀르의 다양한 가능성에 대한 조건을 수행한다(60)”.

     

    도서는 앎의 선험이다. 도서는 읽히기 위해 이미 쓰여져 있으며, 쓰여지기 위해 이미 여백을 남겨 그 위에 비로소 쓰여진다. 최초의 도서, 모든 것에 선행하는 기원은 일종의 복제인데 이는 신의 파괴된  진짜 면모에 해당한다, 라는 성서의 설정은 상징적이다.

     

    렉튀르라 함은 동일한 텍스트를 놓고서 다른 지각, 다른 세계상, 다른 원근법을 지나게 하는 ‘반복’이며, 이에 따라 동일한 소재를 두고서 아주 새로운 모서리각을 발견하는 즉, 주해(exégèse)의 경험이다.

     

    아무리 해박하고 소상한 주해자라 할지라도, 자기가 달아놓은 주해가 텍스트의 모든 독해 가능성을 답파했다, 고 호언장담할 수는 없다. 이미 주해가 다른 주해의 원전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단 주해――우리는 그것을 쓰고, 한 작품의 지위로 격상시킨다. 그것은 출판되고, 공공의 소유가 되며, 또다른 주해를 달도록 한다. 그리고, 그 주해도 또한……(61)”

     

    텍스트의 여백은 결코 메워지는 일이 없다. 여백은 여백을 증식시킨다. 도서 위에 쓰여진 동일한 자격을 갖는 구성요소는 차이를 무한히 생성한다.

     

    “≪도서는 어디에 있을까? ――도서 속에≫

    도서로부터 나오게 되는 모든 출구는 도서 속에 만들어져 있다” (J. 데리다 『에드몽 자베스와 책의 질문』

     

    여백이 증식을 부추긴다. 도서는 틈새를 떠안고 있다. 이런 틈새와 결여는 자신들을 인간으로 하여금 충일시키고, 연속시키고, 일의적으로 통일시키게끔 하는 노력에 동기를 부여한다.

     

    “어떤 한 작품은 무언가가 부족함으로 해서 비로소 완전해진다. 이러한 결여가 작품과 작품 자신(결여와 틈새가 있는 원래 상태 - 옮긴이) 과의 무한한 관계인 것이다. 결여의 양상을 취함으로써 충일된다는 사실(63)”.



    선행하는 텍스트의 주해로 나타나는 에크리튀르의 무한운동이라는 스키마는 탈무드의 변증법과 부합한다.

     

    최초의 도서는 파기된 원본을 대신해 채워넣은 것이다. 신은 아주 처음부터 주의 깊게 모습을 감추고 있다. 근원적 출발점은 이미 비-근원화되어 있다. 근원은 차이 가운데에 있다.

     

    이 상황이야말로 인간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신에 의한 차이와 부정성,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자유이며, 초월이자, 언어이다” (J. 데리다(64)).

     

    “부재함으로 비로소 일컬어지는 신”을 향해 인간이 물음을 제기할 때의 순수성이 탈무드의 생명이다. 신의 텍스트를 자기 몸에 받아들이고, 꼭 그만큼의 주해를 덧붙여 저술하기를 탈무드는 명령한다.

     

    “이스라엘은 그 ‘집필물’ 속에서 신의 의중 전부를, 구원의 유일한 조건을 알아차린다” (A. 슈라키(65)).

     

    어지간한 앎은 도서 속에, 곧 채워져야 할 틈새로서, 미리 고지되어 있다. “한 구절[verset]에서 다양한 의미가 생겨난다” (『생헤드랭(66)』). 왜냐하면, 성스러운 집필물을 구성하는 구절은 ‘완전기호’인데, 어떠한 주해를 덧붙인다 하더라도, “이러한 기호는 같은 의미, 혹은 같은 의미의 새로운 양상을 선보이는 특권을 갖고 있기(67)” 때문이다.

     

    자기동일적인 한 권의 텍스트이면서, 차이의 무한한 생성에 동기를 부여하는 반-세계적 운반체로서의 ‘도서’라는 이념은 블랑쇼가 유대 사상에서 빌려온 것이다.

     

    “최초의 텍스트는 (......) 또한 동시에 주해된 텍스트이며, 이 텍스트는 단순히 그 자기동일성에 입각해 다시 읽어야 할 뿐만아니라, 그 무진장한 차이로 말미암아 새로이 학습을 해야만 한다(68)”.



    ‘도서’는 주해에 의해 파열되고, 갈기갈기 찢겨 다른 구도를 노출함과 동시에, 그 잘린 모양을 목록에 덧붙임으로써 ‘문화재’로서의 지위를 구가한다. 문학과 문화, 창조와 수탈, 산개와 통일이라는 두 힘이, 두 방향 (“가장 격렬한 확산의 방향과, 보다 복잡한 구조를 발견함에 따라, 무한한 다양성을 거둘 수 있는, 어떤 수축의 방향(69)”) 을 향해, 동시에, 도서 속에 작용하고 있다. 도서는 이렇듯, 두 힘, 양 대극, 두 원리의 ‘중간’에, 있다. ‘중간적인 것’ (le Neutre)이란, 이러한 ‘양자 사이’ (entre-deux)간의 분열이라는 사태 그 자체임을 가리키고 있다.

     

    “이리하여 끊임없는 운동 가운데에 있으면서, 끊임없는 확산의 극한에 있는 도서는, 이 확산 자체에 의해, 또한 도서의 본질인 분열에 따라, 다양한 방향으로 작용하는 힘들이 항상 한 점에 집중된다. 이런 분열을 도서는 소멸시키지 않는다. 반대로 분열을 간직하며 그것을 드러내고, 그리하여 분열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성취하는 것이다(70)”.

     

    확산하며 집중적으로 생성하는 변화. 블랑쇼가 ‘집필물’이라 칭한 것은, 대체로 동양적인 음양에 가까운 바, 우주론적인 운동 원리인 것이다.

     

    이 두 원리의 대립에 의한 무한의 생성, 이라는 테마는 레비나스의 ‘그리스-유태’ 도식에 근거하고 있다. 다만, 그리스보다 유태 방식이 더 진실에 가깝다는 레비나스의 주장에 블랑쇼는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두 원리의 대립관계 그 자체에, 서양적 앎의 어떤 가능성을 알아내려고 하는 것이다.

     

    정착과 방황, 통일과 확산, 폭력과 우애, 권력과 이의제기, 질서와 봉기, 법률과 침범, 문화와 문학, 이들은 모두 서로 마주함으로 말미암아 의미가 있다. 마주함으로써, 양자 사이의 차이가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두 항목의 차이로밖에는 지시할 수 없는 이러한 비-개념적 틈새를 블랑쇼는 ‘중간적인 것’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주해의 영원한 운동이자, 대상, 주체, 목적, 방향 어느 것도 갖지 않는 운동”이며, 그로 인해 분열을 바라보는 “분열 이외의 어느것도 아니다” (R. 라포르트(71)).

     

    ‘대화’란 이러한 중간적 성격의 유지와 증식을 위한 특단의 꾀이며, 그 단적인 표현이 문학인 것이다.

     

    “만약 에크리튀르가 차이의 수호자이며, 에크리튀르 자신이 차이가 되어있다면, 그러한 에크리튀르의 수호자는 문학이다” (F.콜랭(72)).

     

    어떤 의미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문학은 특권적이다. “항상 통일성의 시점에서밖에 사유할 수 없는 상태에서 사유를 해방하는 전혀 다른 무엇 되는 파롤(73)”인 문학은, 앎과 앎 아님이라는 두 방향으로 갈라져 있으면서 생존할 수 있다. 오히려, 갈라져 있어야만 생존할 수 있는 것이다.

     

    문학은 “동시에 앎의 행보이며, 앎 아님의 행보이자, 이 둘 사이의 분열, 한 쪽과 다른 한 쪽 사이의 정신적 망설임이다(74)”.



    레비나스의 유대 사상을 바탕으로, 서양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의 이론 얼개를 교묘히 원용하여, 블랑쇼는 서양의 지적 폐소를 공략한다. 하지만, 그것은 블랑쇼가 유대 사상의 최종적 승리에 무신론을 들고나와 이의를 제기하는 일을 막을 수 없다. 블랑쇼는 그리스와 유태를, 상보적이고 생산적인 마주보는 관계로 간주하겠다는 제3의 길을 모색한다. 이렇게 해서 블랑쇼는, 일체의 억단에서 자유로운, 근원적인 자기심문의 경험인 ‘분열 그 자체’가 되고자 하는 꿈을 꾸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