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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려읽기) 사람은 원래 아날로그다 ∿ 요로 선생님
    인용 2024. 8. 23. 00:28

    사람은 온갖 것을 ‘같게’ 만들려고 합니다. 세계화의 본질이 바로 같게 만드는 것이에요. 영국과 미국은 그 선두에 함께 섰던 나라입니다. 특히 영국은 아주 일찍부터 같게 만들려는 움직임을 보여, 세계 각지에 식민지를 두고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까지 불렸죠. 미국은 정보로 세계화를 이루었습니다. 그 수단이 된 것이 위성 TV였고요.

     

    (…) 세계를 ‘같게’ 만드는 것이 세계화라면, 궁극의 ‘같음’은 무엇인지 아시나요. 몇 년 전 NHK가 자기네 방송국의 프로그램 아카이브를 디지털화했잖아요. 바로 그거예요.

     

    디지털 데이터는 01의 패턴이니 완전히 같은 걸 얼마든지 만들 수 있습니다. 아날로그 카피는 복사할 때마다 차이가 생기지만 디지털에는 그런 게 없어요.

     

     

    요컨대 궁극의 ‘같음’이죠. 세상의 디지털화는 다시말해 세계를 ‘같게’ 만드는 거예요. 그것을 눈치 챈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디지털 데이터가 축적된다는 건, 설령 천 년이 지나도 옛날과 완전히 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즉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으로 세계가 채워지는 거죠.

     

    육신은 언젠가 반드시 없어집니다. 인간의 의식은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영원히 죽지 않는 것을 만들려고 한 거겠죠. 그게 정보의 정체예요. 이 세상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이상적인 모습은 정보화, 즉 ‘같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이 유일하게 동물과 다른 점입니다. 동물은 감각이 파악하는 차이의 세계에서 살아갑니다. 스타벅스의 커피도 마루에게는 전부 다른 커피겠지요.

     

    그러면 인간은 왜 ‘같게’ 만들려는 걸까요. 감각으로 들어온 것으로 인해 의식이 혼란해지는 일을 꺼리기 때문이죠. 이 때문에 인간은 감각으로 판단하는 것을 되도록 차단합니다. 시각이든 청각이든, 감각으로 들어오는 자극을 의미 있는 것으로 한정해 최소한으로 만듭니다. 텔레비전은 그 전형이죠. 무의미한 것을 일체 비추지 않잖아요. 감각으로 들어오는 다양한 것들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일이 없어지고, 모든 것에 의미가 있도록 만들어버렸습니다.

     

    의미가 있는 것, 의미와 직결된 감각만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편이 안심되고 안전하며 쾌적하다고 생각하기에 사람은 세계를 의미로 채워나갑니다. 그래서 나는 도시가 싫어요. 모든 의미를 설명할 수 있으니 참고할 만한 게 아무것도 없거든요.

     

    가끔은 스스로가 똑같아지고 있다는 걸 의식하는 편이 좋아요. 고양이를 보면 그걸 조금은 알게 됩니다. 동물한테는 절대로 ‘같은’ 게 없어요. 그들의 눈에 비치는 것은 매일 새로우니까요.


    (…)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개성은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음이 만들어내는 남들과 다른 사고방식이나 행동을 개성으로 착각하고 있어요. 즉 개성은 바로 의식에 있다고 믿는 거죠. 개성이란 나만의 생각과 기억이라고 말하는데, 그런 건 다른 사람에게는 의미가 없어요.

     

    개성이 마음이나 머릿속에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나는 의사 면허를 딴 뒤 정신병원에서 일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마음의 개성이 뭔지 통절히 깨달았죠. 병실의 흰 벽에 자기 똥으로 이름을 쓰는 환자가 있었던 거예요. 그게 마음의 개성입니다. 인상적이었어요. 어째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생각해봤지만 결국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모르는 게 당연하죠. 만약 이해했다면 환자가 한 명 늘어나게 됩니다.

     

    개성이 뭔지 예를 들어 생각해볼까요. 나의 도쿄대 동료 가운데 면역학의 권위자인 다다 도미오 선생이 있습니다. 그는 전통 가면극을 좋아해서 고등학생 시절부터 북을 배웠어요. 사부님 앞에서 북을 치면 대개는 “아니야”라고 한 마디 듣는다고 합니다. 그런 일이 계속 반복되다가 한두 해쯤 지나면 갑자기 “좋아” 소리를 듣는다고 해요. 그러면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고요. 이 이야기가 뜻하는 바를 아시겠나요. 즉 사흘이나 나흘 만에 똑같이 따라할 수 있는 건 개성도 뭣도 아니라는 거죠. 10, 20년 하다 보면 스승이 하라는 대로 아무리 해도 타협이 안 되는 부분이 나옵니다. 그것을 개성이라고 부르는 게 아닐까요.


    연구는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됩니다. 아무도 해달라고 부탁하지 않았으니까요. 게다가 본인도 뭘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당시에는 누가 내가 하는 연구에 대해 물어보는 게 가장 싫었죠. 늘 “뭘 위해 연구하나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뭘 위해 하는지 따윈 몰라. 해보지 않으면 모르잖아”라고 대꾸했습니다.

     

    요즘 세상에서는 “해보지 않으면 모른다”라고 말 못합니다. 그런 식으로 대답하면 어떤 반응이 돌아오는지 아시나요. “정말 무책임하네요”입니다. 하지만 해보지 않으면 모른다는 게 무책임한 걸까요. 아마도 경제를 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이겠지요. 그럴 때면 “경제가 다 뭐야, 경제가 너를 살리고 있어?”라고 말하고 싶어집니다.

     

    마루한테 물어보면 “경제? 그게 뭔데?” 하겠지요. 이럴 때 마루랑 문답하면 좋을 겁니다. “왜 일하는 거야?” “일을 안 하면 먹고살지 못하니까.” “못 먹고살다니, 밥이 없는 거야? 밥은 있어”라는 식으로요.

     

     

    (…) 이 ‘같게 만드는’ 능력이 요컨대 ‘등호’입니다. 앞서 설명한 ‘a=b라면 b=a’가 이것이죠. 수학에서는 이를 ‘교환 법칙’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동물이 교환을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나요? 만약 원숭이가 산에서 토끼를 잡아오고 개가 밭에서 오이를 따와 서로 교환하면 동물의 생활은 편해지겠지요. 하지만 동물은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이 ‘교환’에 등호를 추가한 것이 ‘등가 교환’입니다. 이것을 위한 도구가 돈이고요. 돈을 매개로 모든 상품을 교환할 수 있게 되면 노동이 월급이나 알바비가 되고, 그것이 점심으로 먹을 카레나 컴퓨터가 되기도 합니다. 이건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너무나 이상한 일입니다. 노동이 컴퓨터로 변하는 거예요. 젊은 시절에는 이게 정말 의문스러웠어요. 왜 나랑 컴퓨터가 같을까, 하고요. 요즘 사람들은 그런 의문을 느끼지 않겠죠.

     

    우리 마루한테 만 엔짜리 지폐를 보여주면 잠깐 냄새를 맡다가 금방 자버릴 거예요. 이걸 옛날 사람들은 ‘고양이에게 금화’라고 했습니다. 조삼모사든 고양이에게 금화든, 옛날 사람들은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알고 있었던 거겠죠.

     

    교환이라는 개념은 대인관계에서도 성립합니다. 인간은 자신과 상대를 바꿀 수 있어요. 즉 상대의 입장이 되어 생각할 수 있죠. 이건 민주주의 사회의 근본이자 평등의 근본이기도 해요.

     

    인간은 의식에 강하게 의존하며 살아와 등호의 사회를 만들었습니다. 이는 인간의 특징이며, 우리는 그것을 진화로 받아들여 왔어요. 확실히 진화죠. 언어도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발달한 사회가 감각을 둔하게 만든다는 결점은 아무도 지적하지 않아요.

     

    그러니 감각의 세계를 떠올리기 위해 나는 동물을 봅니다. 고양이와 인간은 어느 쪽이 행복할까요. 다시 말해 감각에 의존해 사는 것과 의식에 의존해 사는 건 어느 쪽이 행복할까요. 사람은 가끔 그걸 확인하고 싶어지거든요.


    어쨌거나 현대 사회는 주위의 환경을 똑같이 해서 감각이 작용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오피스 빌딩 안은 아침부터 밤까지 똑같잖아요. 같은 기온에 같은 밝기, 비도 안 오고 바람도 안 불지요. 현대인은 그런 환경에서 생활하려고 합니다. 그게 쾌적하고 합리적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안 믿습니다.

     

    산속이라도 걸어보세요. 지면은 울퉁불퉁하고, 나무뿌리와 풀이 있고, 벌레가 있지요.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면 질퍽거립니다. 작은 새의 울음과 나무의 술렁임 등 갖가지 소리가 나고 여러 냄새도 납니다. 도시에서의 생활은 이런 감각을 차단하고 있어요.

     

    (…) 그리고 논일이든 밭일이든, 곤충 채집이라도 좋으니 하라고 하는 거죠. 도시 생활은 머리로 생각하는 일뿐이잖아요. 현대인은 좀 더 몸 쓰는 일을 배우는 편이 좋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하고 싶지만 못 해요”라고 반론하는 사람이 많겠지요. 그건 이상해요. 여러분, 뭘 위해 살고 있는지 생각해보세요. 못 한다고 포기하는 게 아닌 바꿔야만 하는 일입니다.

     

    (…) 지금은 알고 싶은 단어가 있다면 스마트폰으로 간단히 조사할 수 있는 시대죠. 하지만 그런 건 내가 보기에는 운동 부족을 일으킬 뿐입니다. 뭐든 손가락 끝으로 누르기만 하면 되는 건 아니잖아요. 손으로 글씨를 적거나 사전을 펼치는 것도 몸을 쓰는 일이에요. 그래서 나는 늘 젊은이들에게 몸을 움직이라고 말합니다.

     

     

    ー 『고양이만큼만 욕심내는 삶: 적당히 탐하고 오늘에 만족하는』 (이지수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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