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려읽기) 늙크크 영포티|영리한 이직러인용 2026. 9. 16. 19:25
오길비: 아래 책 『혼자 못 사는 것도 재주』는 원래 일본에서 먼저 나온 책인데 현재 새책을 안 팔고 있습니다. 일본인들이 몰라본 것이지요. 우치다 타츠루가 얼마나 명석한지를. 우리는 후발주자라는 데서 오는 이점이 있습니다. 생존해 계실 때 현안에 대해 직접 의견을 들을 수 있다는 게 엄청난 행운입니다. 여러분은 그 가치를 알아보셨습니다. 사회에 되돌려줄 일입니다.

우선 통계부터 좀 짚어볼까?
2000년에는 대졸 신입사원의 36.5%가 3년 이내에 회사를 그만둔다. 1992년에는 23%였으니까 10년 사이에 1.5배나 늘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2006년에 직장을 옮긴 사람의 총수는 346만 명으로 과거 최고라고!
정사원 가운데 전직 경험자의 비율은 41.7%(2000)에서 51.2%(2006)로 증가! 정사원 총수 중 근속 3년 미만의 비율은 25%에 달한다.
확실히 이건 만만치 않은 사회문제다. 회사를 그만두는 젊은 회사원뿐만 아니라 그들을 그런 입장으로 내모는 기업의 구조에도 문제가 있다.
(...)
나는 이런 주장을 읽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내가 생각에 잠긴 까닭은, 이 책이 일과 일하는 동기에 대해 쓴 책인데도 200쪽에 달하는 텍스트 가운데 '우리는 과연 일을 함으로써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가?'라는 기본적인 물음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저자에게 그 대답은 자명할 것이다. 일을 하는 것은 '승진'을 하기 위함이요, '보람'이란 '직무급' 시스템이라는 식으로... 요컨대 이 책에는 '인간은 결국 돈을 원하는 거잖아요'라는 저자의 '쿨한' 체념(이렇게 말해도 되겠지요)이 기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린 것은 바로 이 지점 때문이다.
내게는 오히려 '인간은 결국 돈을 원하는 거잖아요'라는 '리얼'한 인간관 자체가 '3년 만에 회사를 그만두는 젊은이'를 재생산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종신고용, 연공서열이 오랫동안 일본적 고용형태로 정착해온 것은 그것이 최종적으로 노력과 보수가 서로 상응하는 '공평성(fairness)'을 보장했기 때문이다.
한편, 저자가 제안하는 연봉제, 직무급이 사람들을 끌어당긴다고 한다면, 그것이 '권한 위임' '자유재량'이란 형태로 '신뢰'를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이 문단이 핵심입니다. 아래 내용은 매우 어렵습니다. - 인용자)
저자는 연봉제, 직무급이란 시스템의 합리성을 적극적으로 강조하지만, 이러한 급여 시스템은 실은 그렇게 합리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연봉제라는 고용계약은 '아직 하지 않은 일'에 대해 봉급을 약속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스토브리그가 되면 프로야구 선수의 연봉계약 갱신이 스포츠 신문의 1면을 차지한다. 그때 고액의 연봉뿐 아니라 '복수년 계약'을 얻은 선수들에게는 반드시 '높은 평가를 얻었다'는 세평이 따라붙는다. 베테랑 선수에 대해 복수년 계약을 한다는 것은 '아직 하지 않은 일', 경우에 따라서는 꽤 높은 확률로 '완수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일'에 고액의 연봉을 약속하는 것이다.
만약 진정한 의미의 합리적인 연봉이라면 '차년도' 봉급이 아니라 '과년도'의 봉급('성과급')을 지불해야 할 것이다. 노동자가 현재 달성한 성과에 대해 보수를 지불하는 한, 거기에 '과잉 지불'이라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예상 외로 활약했지만 신입이기 때문에 '일만 하고 손해'를 봤다는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성취욕이 높은 사람은 '아직 완수하지 않은 성과'에 대한 '선불'의 급여형태를 마다하려고 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완수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일'에 대해 고액의 급여를 약속하는 것이 그렇게 하지 않는 경우보다 일을 완수할 확률이 높다는 것을 사람들은 경험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기능직이나 연봉제가 합리적인 것은 성과를 심사하는 방식으로서 그것이 엄밀하기 때문이 아니다(사실상 엄밀하지 않다). 오히려 아직 내지 않은 성과에 대해 선불로 지불한다는 '신뢰'를 부여받으면 인간의 행동력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머리가 나쁜 비즈니스맨은 '공평성'이나 '신뢰'가 다 무슨 말이냐고 코웃음 치겠지만, 실제로 인간의 노동 능력이 향상하는 것은 자신의 노동을 통해 사회적인 '공평성'을 달성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을 때, 그리고 부여받은 '신뢰'에 부응해야 한다는 책무의 감각으로 노력할 때뿐이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노동이란 본질적으로 과잉 달성(over achieve)이다. 과잉 달성이라는 말에는 단지 '임금에 대한 과잉 노동'뿐 아니라 개인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능력을 뛰어넘는 성과를 달성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아니, '임금에 대한 과잉 노동'이란 노동자 자신이 '능력을 뛰어넘는 일을 해버렸을' 때 나타나는 부작용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만약 노동 조건을 '능력에 상응하는 임금'이라는 식으로 '합리적으로' 설정하면, 우리의 노동 능력은 단번에 찌그러들 것이다.
(...)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
'노인들이 사회적 자원을 독점하는 바람에 젊은이가 기회를 빼앗기고 일본은 이런 사회가 되어버렸다. 그러니 노인은 기득권을 토해내고 젊은이에게 미래를 맡겨라...' 저자는 이렇게 주장한다.
나는 이런 주장에 일리가 있다고 본다. '공평성'을 담보하지 못한다면 사회는 제 기능을 멈추어버리기 때문이다. 나는 젊은이가 '공평한 분배'를 원하는 데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고 본다. 하지만 그것이 원리적으로 '공평성'을 사유하기 때문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저자는 능력이 있는 인간이라면 젊더라도 상응하는 봉급과 대우를 받고, 능력이 없는 인간이라면 노인일지라도 쫓아내는 것이 공평한 사회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젊은 독자 중에는 이 책을 읽고 속이 후련해지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능력은 있지만 가난한 젊은이'와 '무능하고 탐욕스러운 노인들'이라는 심플한 이항대립으로 현대 일본의 사회 상황을 설명하려는 주장은 언젠가 파국을 맞이하리라고 본다.
확실히 앞으로 20년쯤 지나면 '노인들'은 싫더라도 은퇴할 것이고, 일부 '젊은이들'이 '기득권을 향수하는' 자리로 올라갈 것이다. 그때 '옛날에 젊은이였던 사람'들이 '지금이야말로 사회를 개혁할 때'라고 쌍수를 들고 나서면서 자신들에게 선택적으로 주어진 기득권을 포기하고 '가난한 젊은이들'과 나누어 갖는 공평한 사회 시스템의 구축을 추구하려고 할까? 나는 이런 전망에 수긍할 수 없다.
'무능하고 탐욕스러운 노인들에게 수탈당하고 있는 젊은이'라는 자기규정에서 출발하는 인간은 언젠가 노인이 되었을 때 '무능함과 탐욕스러움'을 자신의 의무로 삼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부당하게 수탈해가는 놈들'과 '부당하게 수탈당하고 있는 우리'라는 이항대립으로 사회 모순을 논하는 데 익숙한 사람들은 일단 자신이 '수탈하는 쪽'으로 돌아서게 되면 '이제까지 수탈당한 만큼을 탈환' (다시 말해 개인적인 손익 계산) 하려는 데 혈안이 되어 사회적 공평성의 실현에는 별로 생각이 미치지 못한다. 사회주의혁명이 일어난 이후 혁명당파의 관료들이 부패한 것만 보아도 이를 알 수 있다.
사회적 자원은 그냥 놓아두면 반드시 한쪽으로 몰린다. 될 수 있으면 그것이 잘 '흘러가는' 장치를 저마다 각자의 자리에서 끊임없이 궁리하는 것, 그것이 '공평성에 대한 사유'일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해두지만, 그런 일은 나이나 연봉이나 사회적 입장과는 하등 관계가 없다.
제발 그만해 이러다가는 다 죽어!
결국 주니어를 버리는 시대로 가는 것입니다. 피차 충성할 이유도 없고, 여유도 없으니까요. 이런 분위기가 분야를 막론하고 사회 전반에 만연합니다. 벌어진 상처를 봉합할 여지는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저는 시니어 직급들이 모이는 ‘클리앙’ 커뮤니티를 곧잘 구경하는데, 아무튼 그렇습니다.
직장 다니는 청년 가운데 이직을 생각하고 있거나 실제로 실행하는 비율이 상당히 높다는 것은 꽤나 알려져 있고, 세계적으로도 한때 ‘대 퇴사 시대’가 있었습니다. 제가 현장에서 보니까 이건 눈이 핑핑 돌아갈 정도군요. 전략이라는 은근한 뉘앙스를 풍기기도 했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 경영 불확실성, 최첨단 기술 도입 등으로 인해 가속화되는 면이 있기도 합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20년 전 일본이 용하게도 현재 전 세계의 추세를 살짝 일찍 경험했다는 겁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저는 위대한 우치다 타츠루의 학풍을 계승, 전승할 후보 가운데 하나라는 특이한 처지에 있으므로, 자본의 이동이라는 격한 흐름 속에서도, 다릿심을 튼튼히 하여 휩쓸리지 않으려고 하는데…
남들이 장에 간다기에 제가 똥지게를 지고 갔더니 운수 좋게도 한밑천 잡았다, 이런 엔딩이면 좋겠습니다만. 저만 좋고 끝나는 게 아니라, 들을 귀 있는 사람은 같이 갔으면 좋겠다 싶은 겁니다. 제 공부는 딱 두 마디, “Just say no” 와 “이기는 힘”에 집약되어 있습니다.
'인용'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려읽기) 당신이 혹하는 사이 (0) 2026.09.19 (가려읽기) 골프 안 치고 어떻게... (0) 2026.09.10 (에디터스 레터) "쉬었음"의 기도문 (0) 2026.09.02 (가려읽기) 시장통의 철학 (0) 2026.09.02 (가려읽기) 무엇무엇한 일자리를 "위하여" (0) 2026.08.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