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용

(유인물) 청년이여 비틀즈를 듣자

오길비 2024. 12. 4. 23:06
“너는 어찌하여 울고 있느냐?”
“저는 다섯 살 때 눈이 멀어서 지금 20년이나 되었답니다. 오늘 아침나절에 밖을 나왔다가 홀연 천지 만물이 맑고 밝게 보이기에 기쁜 나머지 집으로 돌아가려 하니 길은 여러 갈래요, 대문들이 서로 어슷비슷 같아 저희 집을 분별할 수 없습니다. 그래 지금 울고 있습지요.”
선생은,
“네게 집에 돌아가는 방법을 깨우쳐 주겠다. 도로 눈을 감아라. 그러면 곧 너의 집이 있을 것이다.”
라고 일러주었답니다.
그렇게 소경은 다시 눈을 감고 지팡이를 두드리며 익은 걸음걸이로 걸어서 곧장 집에 돌아갈 수 있었더랍니다. (박연암)

 

정치적 판단이라는 개념에 관한, 다음과 같은 문장을 읽게 되었습니다.

 

 

“첫째, 고정관념이나 선입견 대신, 이성과 감정을 구사해 스스로 판단 내리기를 바란다.

 

둘째, 진정한 인간적 품성을 익히기를 바란다. 아니, 확실히 갖추기를 바란다.

 

셋째, 현재 일어나는 일에 국한되지 말고, 미래까지 시야를 크게 넓혔으면 한다.”

 

 

논리정연할 뿐만 아니라, 흠잡을 데가 없군요. 선거 때마다 투표장에 액자로 걸어놓고 싶을 정도입니다. 글쓴이는 토머스 페인이고, 1776년 저서 『커먼 센스』 속에 나오는 문장입니다.

 

페인과 해밀턴, 매디슨 등 미국 건국기의 정론가들은 예외 없이 ‘사고력과 도의성, 그리고 상상력’이 중요하다고 설한 셈입니다. 그랬던 그들이 오늘날 미국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목도한다면 절망적인 기분이 들겠죠.

 

 

ーー

(옮긴이 주석)

* 政論+. 우치다 선생이 지어낸 말

** 원문은 理性; 충동적인 감정에 좌우되지 않고 사리를 올바로 분별하여 그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마음의 능력.

*** 道義+. 선생님의 조어

 

 

주간지 AERA에 아침부터 900자를 써서 보냈습니다. 제목은 ‘고베 현 지사 선거와 언론’이었습니다. ‘기성 언론은 믿을 수가 없어’라는 언명이 이렇게나 많은 시민들 사이에서 ‘어제 비가 왔었죠’ 쯤의 예삿일 취급 받음과 동시에 확신적 성격을 얻게 된 이상, 현 상황은 대단히 위험하다 할 수 있습니다.

 

시민들의 대다수가 ‘미디어를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을 품게 된 것은 미디어 자신의 책임입니다. ‘기성 언론은 거짓말하지만, 인터넷상에는 진실이 있다’는 것 역시 부분적으로는 맞는 말입니다. (신문이나 TV보다 훨씬 양질의, 통찰력 있는 논평이 여럿 스트리밍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인터넷 정보에는 옥석이 섞여 있습니다.

 

옥석이 섞여 있는 정보 풀에서 ‘옥’을 가려내려면, 고도의 미디어 리터러시가 필요합니다. 그러한 리터러시를 어떻게 함양할 것인가? 만약 그게 골동품, 혹은 일본도 감정사의 그것과 비슷하다면 ‘일평생 「진품」만을 감득하는 것’밖에는 확실한 방법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오랜 기간 질 높은 정보에만 접근하는 일이 과연 가능한 걸까요?

 

(출처 1 출처 2)


저는 정치 전문가가 아닙니다. 정치학과 국제관계론을 체계적으로 배운 적도 없습니다. 비전문가죠. 그런데 정치는 전문가에게든 비전문가에게든 우리 생활에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우리 일’입니다.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 않았으니 정치에 관한 판단은 내리지 않겠다는 태만함이 통하지 않는 영역이죠. 자칫하면 자고 일어나니 언론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와 학문의 자유를 잃어버리는 일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최악의 경우 전쟁이 나서 그 가운데 있게 될 위험도 있지요. 그렇다면 “정치에 관해서는 전문가에게 맡기고……” 같은 느긋한 태도를 취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일개 시민이라도 생각하고 발언합니다. 특정 당 소속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한 명의 개인으로 발언합니다. 한 명의 개인으로 하는 일이란 “자, 그럼 당신이 정치적으로 주장하는 것을 지금 여기서 해 보시오”라는 말을 들었을 때도 바로 “네, 하겠습니다” 하고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당당하게 말하지만, 아무래도 제가 할 수 없을 것 같은 일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현대 일본 사회에서는 누구도 아이들에게 용기를 가지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고립을 견디는 것과 소수파로 있는 상태를 견디는 것의 중요성도 가르치지 않지요. 그것보다는 친구를 만들어서 집단으로 행동하는 것, 마땅히 되어야 할 다수파를 따르는 편을 가르칩니다. 친구가 없고, 속한 집단이 없고, 다수의 일원이 아닌 것에는 공포를 느끼도록 가르칩니다. 쭉 이렇게 교육했으니 일본 젊은이들이 두려워하거나 자신 없어 하고, 주변 눈치를 살피고, 다수의 무리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성향을 갖게 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게 하라고 쭉 주입받아 왔으니까요. 그 바람에 사회는 점점 활기를 잃어 갑니다. 어느 분야에서도 혁신(innovation)이 일어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완전히 잃진 않았지만 적어도 제가 젊을 때 느꼈던 활기는 일본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부디 한국의 젊은이들은 일본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무지의 즐거움』)


【참고자료】

 

토머스 페인 『커먼 센스』(1776) 원문 (Appendix to the Third Edition)

 

I shall conclude these remarks, with the following timely and well-intended hints. We ought to reflect, that there are three different ways by which an independency may hereafter be effected, and that one of those three, will, one day or other, be the fate of America, viz. By the legal voice of the people in Congress; by a military power, or by a mob: It may not always happen that our soldiers are citizens, and the multitude a body of reasonable men; virtue, as I have already remarked, is not hereditary, neither is it perpetual. Should an independency be brought about by the first of those means, we have every opportunity and every encouragement before us, to form the noblest, purest constitution on the face of the earth. We have it in our power to begin the world over again. A situation, similar to the present, hath not happened since the days of Noah until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