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길비 2024. 10. 31. 20:47

열흘 정도 입원했다. 병실에 티브이가 있었는데, 티브이를 보는 습관이 없어서 한 번도 켜지 않았다. 신문은 밤낮으로 병실에 반입되었다. 시간 여유가 있어서 구석구석 읽었다. 그리고 장탄식했다. 정말 아무런 내용도 없구나. 일본을 대표하는 종합 일간지임에도 불구하고, 단 한 꼭지도 다시금 읽어보고 싶은 기사는 없었다.

 

분명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전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는 하나도 쓰여있지 않았다. , 어제오늘 사이에 일어난 변화에 대해서는 조금 쓰여 있다. ‘어제와 오늘 사이에 언동이 변했다’든가 ‘지난주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전개가 펼쳐졌다’ 정도 내용이 쓰여 있었다. 하지만 1년 전, 혹은 10년 전, 혹은 100년전 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적 문맥 속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부감한다고 할만한 기사는 기어이 한 번도 마주치지 못했다. 일본의 저널리즘에 이제 그러한 지적 습관이 없다는 점만큼은 깊이 깨달았다.

 

허나, 진득하니 기나긴 시간 감각(원문 ‘타임스팬’; 기간, time frame - 옮긴이)에 입각해서 보지 않으면, 어떤 사건의 의미라는 것을 파악할 수 없다. 따라서, 이렇게 문맥에 노출되지 않은 상태에서 속보 기사를 아무리 접한다고 하더라도, 지금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결국 알 수 없다. 열흘 간 신문을 읽고서 그 점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러니 구독자가 줄어드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올해 6월 조사에 따르면, 아사히신문의 발행 부수는 340, 요미우리신문은 586만이었다. 15년 전 아사히는 800만 부, 요미우리는 1,000만 부라는 아성을 뽐냈으니 엄청난 부수 감소인 셈이다.

 

2013년에 필자가 아사히신문의 심의 위원을 지냈던 당시, 아사히는 매년 5만씩 부수가 감소하고 있다는 보고를 들었다. 위기적인 숫자가 우려된다고 필자가 질의하니, 당시 편집국 간부가 이렇게 면박하더라는 것이었다. ‘우치다 씨 계산 좀 해 보세요. 연간 5만 부면 장장 800만 부 해치울 때까지 160년 걸리잖아요’.

 

하지만, 실제로는 딱 10년 만에 60%의 부수가 줄어들었다. 신문기자는 자기 발등에 불이 떨어졌는지조차 잘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걸 그때 알았다. 한 뼘 반경에서 일어나는 일도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이, 그 이외의 사안에는 예외적으로 높은 분석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는 개인적으로 믿을 수 없다.

 

아마도 상당히 예전부터 일본 언론은 ‘현실을 관찰하고, 이해하며, 그 의미를 밝히고,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측하는’ 일련의 지적 프로세스를 방기해 왔다. 정히 보도에서 가장 중요한 점이 ‘객관성’과 ‘속보성’인 게 맞다면, 분명히 그러한 ‘지적 프로세스’란 건 쓸모가 없다. 사건의 ‘해석’에 육박할라치면 ‘주관’이 섞여 들기 마련이며, 한편으로 역사적 ‘문맥’을 논하게 되면 속보성과는 아무 상관 없는 ‘복잡하고 긴 글’을 얘기할 수밖에 없다. 스트레이트 보도를 ‘미가공’ 그대로 나는 모르겠소 던져댐으로써 미디어의 할 일이 정녕 끝난다면 더 이상 토를 달 여지는 없다.

 

하지만, 원래 다 그런 거라고 생각한 순간 미디어의 퇴폐는 손 쓸 도리 없이 여기까지 이르렀다. 어떤 기사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쓰는 기자나 읽는 독자나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뉴스를 읽을 가치가 과연 있을까? 단연 ‘없다’고 본다.

 

신문을 독자가 외면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신문에서 비평성이 거세되었기 때문이다. 비평성이란 이런 거다. 지금 자신이 갇혀 있는 ‘억단이라는 감옥’에서 탈주하여, 조금이라도 자유로이 말하고 싶다, 조금이라도 지성의 가동범위를 넓히고 싶다, 조금이라도 멀리까지 상상력을 질주시키고 싶다 하는… 글쓴이의 어떤 ‘갈망’이다. 그러한 ‘갈망’을 신문기자들한테서 거의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시사를 정형적인 프레임 속에 꿰맞추고서는, 정형구를 서술해 놓은 것에 불과한 그런 문장을 심상히 보아넘길 여유가 허락될 만큼 우리의 인생이 그렇게 길지 않다. (주간금요일 102)

 

(2024-10-11 10:43)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근간 『무지의 즐거움』 『되살아나는 마르크스』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