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에 기초한 사회의 함정
얼마 전, 모 문학상 심사와 관련된 편집자로부터 이런 얘기를 전해 들었다. 이 문학상은 투고된 작품을 편집자들이 우선 ‘사전 검토’한 후에, 후보작을 추려서 심사위원회에 회부하게 되는 식이다. 응모작이 수백 통 되니만큼 당연하다. 이렇게 예비 심사를 하는 와중에, 어떤 젊은 편집자가 글쎄 어떤 작품을 놓고서 ‘떨어뜨려야겠어요’라며 낮은 평점을 매겼고, 그 이유를 물어보니 ‘주인공에게 공감이 안 돼요’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는 것이다.
‘기가 막힐 지경입니다’라고 한숨을 내쉬며, ‘주인공에게 자신이 공감하느냐 안 하느냐가 문학 작품의 질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놓았으니까요….’라고 필자에게 사연을 전해준 그분에게, 필자 또한 이거 참 큰일입니다 하고 대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기준에선 『악령』이나 『변신』은 아마 1차에서 낙선이 확정일 게다.
공감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개인의 기질에 따른 문제다. ‘자기와 가깝다’라는 사실이 작품에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런 건 자명하다고 생각해 왔으나, 언젠가부터는 꼭 그렇지만은 않게 되었더라. 자기와 ‘케미스트리’가 가까운지의 여부를 어느 시기부터 ‘가치’의 기준으로 채용하게 된 것으로 보였다.
금번 도쿄도지사 선거에 관한 논평 가운데, 2위로 득표한 이시마루 후보를 놓고서, ‘젊은이들로부터 공감을 거두었다’는 식의 분석 기사를 다수 접했다. 아마 맞을 거다. 공격적이고 냉소적으로 나오는 게 처세하는 데 강력한 ‘살상 무기’가 된다는 점을 경험적으로 습득해버린 젊은 사람들이, 이시마루 후보에게서 ‘자기와 비슷한 케미’를 느끼는 것도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좌파 쪽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면 ‘젊은 사람들이 정보가 부족해서 그런 선택을 한 거니까, 사실을 잘 전해주었더라면 그런 투표는 하지 않았을 터’라는 식의 ‘계몽주의적’ 매듭짓기에 주로 경도되는 듯 한데, 필자는 이에 쉬이 동의할 수 없다. 투표 행위가 이제 공감 기반이고 보면 정보의 많고 적음은 문제가 안 되기 때문이다. 공감 기반이면, 이시마루 후보가 어떠한 정치적 입장을 취하는지도 공약이 무엇인지도 상관없다. 인터넷 동영상을 보고서, 유세하는 걸 듣고서, 나하고 ‘한솥밥 먹겠다 싶을’ 인간이다 싶으면, 이제 투표 행위를 결정할 정보는 달리 필요치 않게 된다.
그래도, ‘공감’ 기반으로 정치적 판단을 내린다는 게 얼마나 위험한 처사인지 나는 좀 똑바로 ‘어나운스’를 해야겠다. ‘공감’ 기반으로 정치적 판단을 내린다는 건, 이해도 공감도 할 수 없는 사람들과의 의사소통을 아예 차단해 버리겠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가만 보면 이러한 심각성에 관해선 좌파 쪽 사람들마저 그렇게까지 신경질적이지는 않은 듯하다. 상당히 오래전부터 ‘국민 눈높이’라든가 ‘생활자 시선’ 같은 말들을 좌파 쪽에서도 주워섬기게들 되었다. 이걸 토대로 공약이 마땅한가를 판단하자고 해버리면, 이건 숫제 ‘자기한테 갈 이해타산’을 기준 삼아 정치적으로 행동하면 된다는 논리로 귀결된다. 하지만, 자기 이익의 증대가 집단 전체적 이익의 증대와 결부하지는 않는다. 부분 최적과 전체 최적은 서로 이따금씩 배반한다. 당연한 일이다. 이렇게 된 이상, 둘 중 어디쯤에 서야 ‘맞아 떨어질지’를 사량하는 게, 정치적으로 성숙한 시민이 마땅히 따라야 할 일 아니겠는가? 사정이 이런데도 선뜻 ‘마음 가는 대로’라는 말을 던지는 사람이 과연 우파가 선전하는 공감 기반 투표를 비판할 건덕지가 있을까?
내가 보니까 더 불안한 게, 공감 기반 정치에 대해 위기의식을 느끼거나 이에 비판을 가한 사례를 지난 20여 년 동안 접해 본 경험이 없다는 거다. 한술 더 떠 주야장천 ‘이해도 가능하고 공감도 가능한 동류’가 어디부터 어디까지인지 정밀한 경계선을 그어가며 그걸 애써 ‘정체성 확립’이라 칭하더라. 그 무익한 작업에 일로매진 골몰해 온 것이었다. 그런 식으로 ‘내 편’이다 싶은 자그마한 눈짓이나 표징만으로 자기편임을 인정해 내는 기술을 갈고닦아 왔다. 무진장 애들 쓴다. 그럼에도, 기껏 깨알같이 공감 가능 영역을 다져놓았건만, 어느 순간 ‘자기편’ 말고는 의사소통이란 게 곤란해지지 않았는가에 대해서는 좀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
‘인싸’ 인정이랍시고 하는 짓이건만, 그건 제 혼자서 ‘저놈은 나랑 죽이 맞을 법한 인간야’라고 굳게 믿는 것뿐이고, 일종의 관계 망상증에 지나지 않는다. 비정규직인 젊은이가 ‘경영자 시선’을 내면화한다든가, 연봉 200만 엔 받는 인간이 IT 산업 백만장자에게 갈채를 보내는 등의 광경은 이제 드물지 않다. 그러나 상대방이 ‘가난한 이너서클 후보생’을 자기들 내부 파티로 불러줄 뾰족한 계제 따위는 생겨나지 않는다.
근대 시민 사회가 그 이전까지 해오던 부족제 사회에서 탈피할 수 있었던 건, ‘공감 베이스’를 폐하고서 ‘사회 계약 기반’으로 갔기 때문이다. 공감 베이스로 하면 어느 정도 이상 되는 규모의 집단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옛 유고슬라비아는 일찍이 ‘6개 나라, 5개 민족, 4개 언어, 3개 종교, 2개 문자’로써 이루어진 혼성 국가였다. 그러던 것이 ‘정치 단위란 공감 기반이어야 옳다’ 하는 이데올로기가 지배적으로 대두함에 따라, 결국 내전 끝에 6개 나라로 갈라서게 되었다.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는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에 이런 서술을 남겼다. “문명이란 무엇보다 일단 같이 살아가겠다는 의지에서 비롯된다. 다른 이를 고려 대상으로 삼지 않으면 않을수록, 비문명적이며 야만에 가깝다는 말이다. 야만이란, 쪼개지려는 경향이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형형색색의 야만적인 시대는 인간이 흩어지는 시대이며, 서로서로 갈라져서 적의를 품는 소집단이 들끓는 시대인 셈이다.” (『대중의 반역』)
지금 온 천지가 다시금 야만으로 퇴행하고 있음이 필자의 눈에 선하다. (『주간금요일』 7월 17일자)
(2024-07-27 08:55)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근간 『되살아나는 마르크스』 『한 걸음 뒤의 세상』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결이라는 말을 싫어한다. 누군가가 결이라는 낱말을 꺼낼 때는, 자신의 취향이나 가치관을 돋보이게 하거나, 나아가 그것과 맞지 않는 타인에 대한 묘사로 이어지곤 하기에. 내가 다니던 회사의 옆 부서 선배는 신입이 들어오면 공용 간식을 사 오게 시켰다. 한정된 자원으로 어떤 디저트를 구해 오는가, 팀의 활력을 북돋아 줄 간식을 고르는 결정력이 있는가 하는 문제는 물론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 한 명은 5만 원이라는 간식비로 고디바의 초콜릿 15구짜리 한 세트를 사 왔고, 다른 한 명은 오예스와 몽쉘, 노래방용 새우깡을 사 왔는데, 그 둘은 전혀 다른 이유로 그 팀장과 결이 맞지 않았고, 이 간식 심부름 에피소드는 모든 직원이 아는 밈이 되었다. “아, 그 고디바 사 왔다는 사람이지? 어쩐지.” “아, 그 싸구려 간식만 잔뜩 사 왔다는 친구? 어쩐지.”
오래도록 결을 의식적으로 잊고 지내던 나는, 본격적으로 배운 수영을 통해 결을 촉각적으로 인식해 본다. 물에는 결이 있고 나는 결을 자주 거스른다. 수영이란 운동에 익숙해지면 익숙해질수록 물의 결에 함께하게 된다. 첫 달은 힘을 잔뜩 줘서 관절이 아프고 몸무게가 빠진다. 두 번째 달부터는 요령이 생겨 숨이 덜 차고 처음 몸을 담글 때의 수온도 적대적이지 않다. 그러다 조금 더 속도를 내기 위해 팔을 더 내밀고 조금 더 추진력을 내기 위해 물의 결을 의식적으로 거스른다. 몸이 편한 방향이 아니라 몸이 잠깐 불편하도록 통제하면서 물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러므로 그의 결을 거스를 때에도 실은 커다란 관점에서 나는 그의 결에 나를 맞추고 있는 셈이다. 혹은 기다란 나의 생이란 관점에서 나는 그의 결에 그를 맞추고 있다. 나아가거나 머무르려고.
- 김미래, 『편집의 말들』, 도서출판 유유, 2023, pp. 133.